나의 잠 / 유진상
“나는 내 시간을 다음과 같이 보낸다.
반은 잠들고 나머지 반은 꿈을 꾼다.
잘 때는 절대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을 꾼다면 유감일 것이다.
잠이란, 완벽히 천재적인 것이다.”
‘Either/Or : A Fragment of Life’ – Søren Kierkegaard
잠에 대한 관점들
잠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사람들은 하루의 약 3분의 1을 자면서 보낸다. 즉 일하고 즐기는 시간 이외의 휴식과 보충을 위한 시간이 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의 ‘주’는 잠을 자기 위한 공간, 즉 침실을 핵심으로 한다. 어쩌면 인간의 노동의 많은 부분은 가장 편안한 잠을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과 관련된 산업의 규모는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커지고 있다. 사람들은 더욱 고급스럽고 편안한 침실, 침대 및 관련 소비재를 필요로 한다.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동경비와 식대 외에 가장 중요한 소비항목이 호텔과 같은 숙박장소를 확보하는 것이며, 이는 관련된 여행 관련 산업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숙면과 관련된 의료, 생활, 가전산업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다. 잠은 사회적, 경제적, 산업적, 정치적, 의료-과학적 차원에서 점점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념적으로 잠은 ‘잃어버린’ 시간으로 간주되고 있다. 즉 많은 이들이 잠을 배척해야 하는 것으로, ‘줄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한국사회는 일제식민지와 한국전쟁을 통해 완전히 붕괴된 사회와 산업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근면과 헌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하거나 공부하는, 즉 노동과 교육의 시간을 더욱 늘리고 확대하기 위해 잠을 줄이기를 권해 왔다. 밤새 일한다거나 공부하는 일은 덕목처럼 여겨졌으며, 이로 인해 무리하게 건강을 해치는 밤샘과 불면이 일상생활과 산업 전반에 만연하게 되었다. 한국사회의 24시 문화, 불야성, 새벽귀가와 같은 용어들은 잠이 어떻게 극단적으로 축소되거냐 생략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잠의 부재와 축소는 정상적인 삶의 형태를 왜곡하고 생리적으로 비정상적인 리듬을 정상성으로 인식시킨다. 이와 관련된 많은 연구들은 사회적 변화와 특히 새로운 산업적 동기들이 이러한 비정상의 정상화에 간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잠과 관련한 커다란 세 가지 담론들이 있다. 첫째는, 잠의 의료-생리학적 실태를 밝히는 과학적 담론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잠의 ‘주기’와 관련된 것이다. 즉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는 자연적 환경에 따라 잠이 들고 깨는 ‘동승환경’에서, 크게 보아 잠이 드는 단계, 깊은 수면, 렘-수면, 잠이 깨는 각성단계 등의 각 단계들의 수면활동을 과학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잠’은 이와 같은 생리-의학적 관점을 소설의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 잠의 초-과학적 역량과 결부시키고 있다. 두 번째는, 잠의 사회학적 관계들을 살펴보는 담론들이다. 즉 사회적 변화와 인간활동의 변모에 따라 잠의 양태가 어떻게 달라져 왔으며, 달라지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잠이 어떻게 부족해지고 있는지, 잠의 질이 저하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는 다양한 사회적 조건들의 변화와 관련이 되어 있는데, 사회적 가치, 산업적 요구, 교육적 관행과 제도, 문화적 요인들이 폭넓게 거론되고 있다. 조너던 크래리의 ‘24/7 잠의 종말’은 바로 이러한 관점을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책이라고 하겠다. 세 번째는 잠의 창조성과 관련된 담론이다. 즉 잠이 ‘잃어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생산의 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잠을 통해 얻어지는 휴식과 이면적 두뇌활동, 그로 인한 재생과 회복, 영감과 전환 등이 거론된다.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의 창조적 결과물들이 수면과 휴식에서 비롯된다는 주장도 여기에 포함된다. 프랑스의 시인 르네 샤르의 예에서 보듯, 잠과 삶의 병치는 두 가지를 동등한 것으로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히프노스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샤르의 세계관에서 잠의 창조적 생산성에 대한 좋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잠을 일종의 수동적 저항의 형식으로 인식하는 문학과 예술에서의 사례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인 조르쥬 페렉의 ‘잠자는 사나이’, 이반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의 생애’, 헤르만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한병철의 ‘피로사회’ 등에서 나타나는 ‘아무것도 안하는 인간’에 대한 서술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인간상은 ‘아무것도 안함 = 잠’이라는 등식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를 통해 잠이 하나의 태도에 값한다는 관념을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잠을 묘사하는 방식 속에서 잠을 수동적 저항의 형태로 다루는 경우가 빈번한 것을 볼 때, 이는 상당히 근거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인칭의 잠
잠은 일인칭이며 나의 것이다. 잠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은 마치 사랑이나 죽음이 나의 것인 것과 같다. 사랑이나 죽음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것처럼, 잠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것은 나에 한해 일어나는 일이며 오직 내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잠의 경험은 ‘자기임종’의 반복적인 수행과도 같다. 아무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점에서, 오직 스스로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부드러운 죽음과 재생으로의 도약은 누구에게나 일인칭이다. 얀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이오네스코는 ‘모든 사람은 처음으로 죽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각자의 죽음이 내포하는 진부할 수밖에 없는 새로움은 너무나 낡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사랑의 새로움과 비교할 만하다. 모든 사랑이 지니는 너무나 닳고 닳은 젊음 역시 그러하다.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있어 사랑은 항상 새롭다. 그는 실제로 마치 이전에 아무도 말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사랑의 단어들을 내뱉는다. 마치 태초 이래로 남자가 여자에게 처음으로 말하는 것처럼, 이 봄이 세상의 첫 번째 봄인 것처럼, 그는 사랑의 말들을 내뱉는다.” 조르쥬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의 의미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이 ‘죽음과 죽음의 고뇌를 미리 맛보게 하는 행위’라고 말하면서,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낭비에 가까운 그 순간을 작은 죽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 순간에 뒤따르는 잠 또한 폭력과 노동, 그리고 성적 황홀경의 팽창 이후에 도래하는 죽음과 유비적 관계에 있다. 잠은 일인칭인 동시에 매번 새로운 소멸과 재생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삶을 완전히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시점을 제공한다. 먼저, 그것은 일종의 정지, 휴지로서 삶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삶의 삼분의 일이 잠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실제로 우리가 꼼짝 않고 대부분 누워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무의식의 시간은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잠을 통해 대부분의 동물들은 ‘치유’와 ‘재생’의 기회를 얻는다. 깨어있는 동안 겪는 피로와 고통, 상처와 정신적 위기를 부정적 기억의 차단과 신체적 재활을 통해 극복하는 과정이 잠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REM 수면 동안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물의 뇌는 잠과 꿈을 통해서 나쁜 감정을 소멸시키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은 일인칭을 넘어선다. 삶은 일인칭을 통해 타자, 세계와 이어진다. 세계는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일인칭들의 공집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잠은 일인칭에 대해 비어있는 어떤 것이다. 잠은 내게 귀속된 세계의 정지 혹은 바깥을 향해 넓어지는 통로의 형태를 띤다. 세계의 바깥이 무의식이라면, 잠은 이 세계에 공공연하게 드리워진 무의식이다. 이런 점에서 잠은 세계의 총체성을 뒤흔든다. 나의 죽음이 그러하듯, 나의 잠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세계에 속하지 않을 권리. 그것이 잠에 대한 권리다. 나의 잠은 나의 탈-세계, 탈-현재, 탈-자아를 포함한다. 반대로 그것은 세계의 비-현재성이 나의 삶으로 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하다. 나의 세계는 삶과 잠의 균형으로 이루어진다.
잠의 공유
잠을 통해 시공간의 기원에 이르는 통로를 찾아나서는 이야기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잠’은 마치 양자역학적 세계와 같은 초-시공간적 실재가 잠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는 설정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과학자인 주인공의 어머니가 찾아 나선 잠에 대한 탐구의 여정을 그 아들이 따라 나서면서, 궁극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자아가 동시에 서로에게 연결되는 순간이 도래한다. 뿐만 아니라, 6단계의 잠의 심층이 존재하며 그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존재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연결된다. 사물들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열역학적 비가역성에 한정된 존재들만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 이 존재들 역시 잠을 통해 유기적 대사의 최저점을 넘어서면서 시공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에 이른다. 이는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진술로 요약된다. : “잠과 꿈의 끝에는 시간과 물질을 초월하는 상태가 존재해요. 힌두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합쳐진 공간이에요.” 여기서 잠은 양자물리학과 엔트로피, 진화론과 종교, 신유물론과 영혼, 자아와 총체성 등의 관계항들을 모두 가로지르는 중요한 현상이자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소설의 말미에 주인공인 자끄 클라인은 인류의 진화가 바로 잠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진화의 비약은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러 온 미래의 사람들이 아니라… 꿈 속으로 젊은 ‘자기 자신’을 찾아온 미래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양자역학적 잠에 대한 이 줄거리의 흥미로운 점은 잠을 통해 세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 그리고 모든 의식들이 한 장소에서 서로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세계가 동일한 시공간에 모두 존재한다는 생각은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도서관의 책들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언어의 절대적인 모든 조합들이 기록되어 있다. 도서관 전체가 거대한 무의식의 잠재적 매트릭스인 것이다. 여기서는 깨어있는 것과 잠들어 있는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뒤섞여 있다. 이 도서관에서 사람들은 ‘책들의 목록’, 최종적인 책, 모든 지식의 지식을 담고있는 책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다. 사람들은 도서관의 회랑에서 살아가고 거기에서 잠이 든다. 이 회랑들은 거대한 무의식의 건축물처럼 사방으로 향해 이어져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도서관의 공간은 세계 혹은 우주의 등가물이다. 의식의 심층을 통해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삶 뿐 아니라 잠을 통해 구현된다는 생각은 잠이 단순히 의식의 부재나 정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계를 향해 깨어나는 잠
잠을 저항이나 부정의 형태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면, 그 가장 대표적인 예는 조르쥬 페렉의 ‘잠자는 사나이’라고 할 것이다.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나 허만 멜빌의 ‘바틀비’를 떠올리게 하는 페렉의 소설 ‘잠자는 남자’는 주인공이 선택하는 무기력과 무관심에 대해 집요하고도 정교하게 다루고 있다.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도 어려울 만큼 실험적인 이 글 속에서 주인공은 2인칭 대명사인 ‘너’로 한정되어 있으며, 그는 반수면 상태의 무기력과 ‘제목’ 속에서 잠들어 있다. 제목 속에서 잠들어 있다는 것은, 주인공인 실제로 잠들어 있다는 것을 제목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반수면 상태에서 그가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지적 시점의 독자가 ‘그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소설 전체는 누군가가 ‘너’에게 뇌까리고 있는 무한히 세세하면서도 무의미에 가까울 만큼 무관심으로 점철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무언가 무너져버린, 무너지고 있는 세상에 대해 그것에 속한다는 의식 자체가 사라져 버린 ‘너’에게는 이름도, 그에 대한 정확한 묘사도 없지만, 유일하게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너는 스물다섯 살이고, 스물아홉개의 이빨을 가지고 있으며 셔츠 세 장과 양말 여덟 개와, 네가 더 이상 읽지 않는 책 몇 권과, 네가 더 이상 듣지 않는 음반 몇 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 정도이다. 이 소설에서 잠은 익명의, 무관심과 무기력의 상태로 점철된 삶의 다른 이름이다. 이 소설의 전체 구조는 마지막 한 문단에 집중되어 있다. 마지막 순간 주인공은 자신이 더 이상 잠든 상태가 아니라고, 깨어난 상태라는 것을 인식하는데, 이 역시 2인칭의 화자에 의해 발견되는 사건으로 기술된다.
“그렇지 않다. 너는 더 이상, 이 세계의, 역사가 더는 손길을 내뻗지 못하는 세계의 비가 내리는 것을 더는 느끼지 못하는, 밤이 오는 것도 더는 느끼지 못하는, 익명의 지배자가 아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도, 맑은 사람도, 투명한 사람도 아니다. 너는 공포를 느낀다, 너는 기다린다. 너는, 클리시 광장에서, 내리는 비가 멎기를, 기다린다.”
어쪄면 잠은 2인칭에 의해서만 기억되고 서술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든 자아는 스스로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깨어나는 순간 도래하는 의식의 응시에 의한 것이다. 꿈속에서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건은 깨어나면서 그것을 회상하는 의식의 응시에 의해 기억된다. 기억되지 못한 꿈의 사건들은 모두 심연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의식의 응시에 의해 회상되는 자아의 시선은 바로 2인칭의 대상인 것이다. 잠들어 있는 자신을 깨우는 또 다른 자아에 대해 2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레지스탕스 운동가이자 시인인 르네 샤르는 자신의 시에서 그리스 신화의 잠의 신 ‘히프노스’를 통해 이야기한다. ‘히프노스’(hypnos)는 레지스탕스였던 그의 작전 암호명이었다. 그에게 있어 시인은 ‘깨어있는 물리적 세계와 잠의 공포스러운 이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자’이다. 대표작 ‘히프노스의 잎새들 Les feuillets d’Hypnos’에서 그는 헤라클리투스를 인용한다. : “자고 있는 사람들은 행위하는 자들이자 집합이다. 그들은 우주 안의 생성의 노동자들이다.” (아포리즘 75) 샤르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깨어있는 자들은 그들에게 공통된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잠 속에서는, 각자 자신의 세계를 향해 돌아 눕는다.” (아포리즘 89) 샤르에 따르면, 잠의 신인 ‘히프노스’의 역할은 잠든 이들을 깨워 그들을 다시 하나의 세계, 사유의 세계로 되돌아오도록, ‘공포의 너머’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소설 ‘바다와 노인’에서 작가는 잠든 이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오두막 안, 위쪽에는 노인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항상 엎드려 꿈틀거렸다. 아이는 그 옆에 앉아 그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들의 꿈을 꾸고 있었다.” 잠든 이를 바라보는 이의 시선은 임종을 떠올리게 한다. 한없이 무기력하고 조용한 육체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 속에서 대상은 이미 멀어지고 있다. 잠이 그의 것인 것처럼 죽음도 오로지 그에게 속한 것이다. 소년은 그가 사자의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전시는 한낮의 잠과 동승환경을 이루는 밤의 잠(초저녁-심야-렘 수면-새벽의 각성)을 각각의 시간의 흐름과 의식의 특이성을 통해 다루고 있다. 이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모두 잠이라는 카테고리를 통해 경계, 응시, 탈-세계, 연결, 각성 등의 주제를 천착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